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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한국사회에서 오남용된 지 오래다. 독재·군부 정권에 맞서 정치적 자유를 외칠 때는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 예찬론자 윤석열 전 대통령의 영향도 크다. 취임사에는 자유란 단어가 35번 들어갔다. 공식석상에서 연설할 때마다 자유를 언급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도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라며 '자유 수호'를 핵심 명분으로 들었다.

자유의 오도는 한국에만 국한한 현상이 아니다. 경제 불평등 연구의 대가이자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신간 '자유의 길'에서 "애국과 성조기, 자유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미국 우파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는 "우파는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그들이 자유를 정의하고 추구하는 방식이 많은 시민의 자유를 크게 축소하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윤 전 대통령의 불법계엄이 본인을 제외한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려한 것과 꼭 닮았다.

저자는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기업의 자유에 대해 경고한다. 기업의 자유는 곧 자본가의 자유를 의미할 때가 많고, 소수 자본가의 자유가 다수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진보적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스티글리츠 교수는 자유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에서 '자유와 더 나은 세상'이란 실체가 없는 공허한 미사여구, 진부한 말의 연속에 불과하다"며 "전 세계는 특히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자주 자유를 옹호했으면서도 기본적 자유를 빼앗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을 때 이러한 모순을 명백히 목격"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자유란 "공평, 정의, 그리고 행복이라는 개념과 내재적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자유"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진보적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책의 부제인 '경제학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해법이다. 진보적 자본주의란 "규제와 경쟁 촉진, 세금에 기초한 공공투자, 불평등의 개선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제 체제다. 책을 덮고 나면 진보와 자본, 자유와 평등, 시장과 규제란 개념이 그간 얼마나 정치적 이념에 오염되고 종속돼 왔는가를 새삼 깨닫는다. 원제는 'The Road to Freedom: Economics and the Good Society'.

2008년 벌어진 글로벌 금융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빌 클린턴 정부 당시 경제자문(1995~1997년)으로 일하면서 금융 규제완화에 강력히 반대했다. "금융부문의 '자유화'가 결국 우리 모두를 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퇴임한 후 의회는 은행 규제완화 법안과 정부가 파생상품을 규제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는 결국 리먼 브라더스 파산이 촉발한 금융위기의 배경이 됐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의 "늑대를 위한 자유는 흔히 양에게 죽음을 의미한다"를 인용하며 "양(노동자, 일반 투자자, 그리고 주택소유자)을 희생시켜 늑대(은행가)에게 자유를 준 것"이라고 비판한다.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 자유 의지에 의해 굴러간다고 여기는 것도 환상이라고 꼬집는다. "부정행위가 만연하고 신뢰가 낮아진 시장, '고삐 풀린 시장'은 전혀 시장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제약이 없는 세상은 권력만이 중요한 정글"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규칙이나 규제가 시장과 사회를 구성하는 필요 조건이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코로나19 당시 USB메모리 시행된 백신 예방접종이 대표적 예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지출할 자유를 약간 제한(세금 납부)함으로써 훨씬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유를 확장"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세금을 활용한 국가 예방접종은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자유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입원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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